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1361년~1362년, 북로남왜 === 이제 1360년대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이 무렵에는 중국을 뒤흔든 [[홍건적]](紅巾賊)이 고려로 몰려오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왜구는 그런 사정은 전혀 봐주지 않고 고려를 유린했다. 이 해 4월에 왜구는 현 [[경상남도]] [[사천시]]인 사천(泗川)을 공격하고, 5월 경에는 [[전라북도]] [[군산]]을 공격했는데, 당시 전라도와 경상도는 큰 가뭄으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굶어죽고 하던 시기라, 그런 상황에서 발생한 왜구의 침입은 더욱 힘들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왜구가 평택을 향해 공격해오자 '''개경은 또 비상 체제로 돌아갔으며,''' 여러 장수를 새로운 자리에 임명하여 왜구와의 싸움에 대비할 채비를 했다. 그런데, 이때의 인사 조치에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겸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로 임명된 사람이 조선 [[태조(조선)|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인 [[이자춘]](李子春)이었다. 이제 슬슬 왜구와의 싸움을 계기로 새로운 세력들이 존재감을 어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책도 거의 소득은 없었는지, 왜구는 강화도를 공격해 '''3백여 명의 백성을 죽이고 미곡 4만 석을 노략했다.''' 이때 심몽룡(沈夢龍)이라는 사람이 왜구와 치열하게 싸워 13명을 죽이는 무쌍을 찍었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살해되었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교동은 또 공격을 당했다……. || [[파일:JOkLs09.jpg|width=560]] || 바로 전 해에 고려를 철저하게 털었던 왜구는 다음 해인 1361년에도 역시 쳐들어왔다. 이때 전라양광도방어사(全羅楊廣道防禦使)였던 김횡(金鋐)은 [[목포]] 사람들과 함께 왜적의 배 다섯 척을 나포하고 3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등 당시 왜구를 상대한 고려군 중에서는 꽤 괜찮은 활약을 보였다. 물론 대세에는 역시 별 영향을 못 주어서 3월에는 현 [[남해군]]이, 4월에는 고성과 [[울산]]이 연이어 왜구에 털렸다. 이후 8월에는 [[부산]]이, 그 이후에는 현 경상남도 [[양산시]]인 양주(梁州)가, [[김해시]]인 김해부(金海府)가, 또 사천, 밀성 등이 '''끝도 없이 털렸다.''' 그런데 그 사이에 홍건적의 침입은 절정에 올라, 공민왕이 개경을 탈출해 몽진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1362년 1월, 고려 조정은 간신히 개경에서 홍건적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는 사이에 2월 경, 현 경상남도 [[하동군]]인 악양현(岳陽縣)이 왜구에게 공격을 당했다.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된 6월이 되자, 공민왕은 수원에 궁궐을 지을 생각을 했으나, 조정에선 이를 반대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걸작인데, 보통 궁궐 공사를 반대한다면 예산에 관한 문제일 텐데 이때 반대 의견은 '''왜구의 침공이 염려되어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디 왕이 경상도나 전라도 가는 것도 아니고 수원에 간다는데, 왜구 때문에 못 간다는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차라리 수원보다는 충청북도 [[청주시|청주]]에 궁궐을 지으라고 권했다. 이는 당시 수원의 중심지가 달랐기 때문인데 오늘날과는 달리 옛날 수원의 중심지는 해안가에 가까웠다. 즉 조정의 주장은 "위험한 해안가 말고 안전한 내륙에 궁궐을 짓는 게 좋겠습니다." 인 것. 알다시피 청주가 속한 충북은 유일하게 바다와 맞닿은 곳이 없을 정도다. 물론 충청도도 털린거 보면 안심하긴 어려웠겠지만...] 또한 이 해에는 [[나하추]](納哈出)가 수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는 일도 있었다. 이는 이성계가 무쌍을 찍으며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고려는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판이었다. 바다와 대륙 모두에서 압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